Search Results for '추억'

9 POSTS

  1. 2010/02/25 영혼기병 라젠카 (4)
  2. 2009/12/03 '열심히 했는데도 안되면 그건 어쩔 수 없다." (8)
  3. 2009/07/21 adieu (6)
  4. 2009/01/30 기숙사에 갔었어. (6)
  5. 2007/12/14 책을 쓰고 싶어졌다. (4)
  6. 2007/06/22 비가 아직도 계속 내린다. (6)
  7. 2007/05/02 시험 (2)
  8. 2007/01/14 내 방, 다락방. (8)
  9. 2006/07/17 롯데 팬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8)
어릴 적 즐겁게 보았던 만화가 여럿 있다. 엄마도 좋아했던 슬램덩크, 기가 슬레이브를 언제 쓸지 두근두근 했던 마법소녀 리나, 어린 나에겐 너무 어려웠지만 멋모르고 재밌게 봤던 나디아...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영혼기병 라젠카다. 신해철이 부른 고딕락 풍의 테마곡 'Lazenca Save Us', 그리고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도 유명했고, 그 당시로써는 막대한 제작비가 들어간 초대형 스케일의 국산 애니메이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물가물하지만 부분적으로 3D 기법이 들어간 애니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라젠카를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주인공이 하찮았던(!) 최초의 만화였기 때문이다.

물론 스토리의 진행상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이었던 남자애찾아보니 이름이 '아틴'이란다는 봉인되어 있던 가이런, 즉 라젠카와 반응하는 선택받은 녀석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다지 정의로운 녀석도 아니었고, 지구를 구하고픈 마음도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자신의 그런 능력을 귀찮아했다. 어디하나 특별히 잘난 것도 아니었고, 자신만이 가졌던 라젠카를 조종할 수 있는 그 능력조차도 처음에는 완벽한 것이 아니어서 그 멋있는 라젠카가 뒤뚱뒤뚱 걷다가 넘어지기도 하는, 그야말로 당황스러운 주인공이었다.

그게 충격이었다. 주인공이 이렇게 멍청할 수 있다니! 그때까지의 만화 주인공이란 불꽃슛을 쏘는 통키라던가, 독수리슛의 슛돌이라던가, 최강의 지구용사 다간은 말할 것도 없었고, 밤만 되면 삐리링 변신하는 세일러문까지... 뭐 전부 멋있고 이쁘고 착하고, 싸우기만 하면 다 이기는 그런 녀석들이었는데 이 만화의 주인공이란 녀석은 그렇게 바보같았던거다.

그래서 그렇게도 좋았다. 왠지모르게 현실적이었달까. 그 이후로 감동적으로 보게 된 만화도 살짝 바뀌었는데, 주인공에게서 무언가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것들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슬램덩크의 강백호라던가 바람의 검심의 켄신같은 녀석들은, 물론 비상식적으로 강한 모습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 주인공과 싸우는 상대 역시 단순히 무찔러야할 나쁜놈이 아니라, 그 역시 주인공과 똑같은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같은 목표를 위해 노력해온, 혹은 서로 다른 정의를 믿었던 또 한명의 주인공이었다.

아쉽게도 라젠카의 엔딩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뭐 찾아보면 알 수야 있을 것이고 원하면 어디선가 받아서 다시 처음부터 볼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다. 이거 하나면 족하다. 사춘기의 한 복판에 서있던 나에게, 그러니까 이 영혼기병 라젠카라는 작품은 제법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는거. 추억은 때론 추억으로 남겨두는게 더 아름다운 법이니까.




2010/02/25 13:26 2010/02/25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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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의 나에게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그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첫 시험이니 잘 치겠답시고 한 달 전부터 시험공부를 하던 것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날 정도다. 그리고 시험 치는 날은 마치 내 인생이 이 시험에 걸린 것처럼 긴장해서는 문제들을 풀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하루의 시험이 끝나고 나면 항상 어려웠던 문제들은 이미 친구들끼리 서로 답을 맞춰본 후인지라, 대략적인 내 점수가 나왔었다. 그런데 시험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때로는 잘 치기도 하고 때로는 못치기도 하는 것이다 보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망쳐버린 시험지를 들고 집에 들어가야 하는 날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날은 정말이지 집에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 정도였다. 엄마한테 혼날 생각에 완전히 풀이 죽어서는, 그저 집으로 향하는 동안 스쳐지나가는 거리가 모두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랬던 나에게 있어서 위로가 되준 것이, 아빠는 왠만해서는 시험 성적으로 날 혼내지 않으신다는 점이었다. 오후에 집에 들어가면 엄마한테 한참 혼나기야 했지만, 저녁에 아빠가 오셔서는 그래도 그 이후로 별다른 꾸중이 없으셨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결과도 중요하다'라시던 엄마에 비해, 아빠는 '열심히 했는데도 결과가 그런거면 어쩔 수 없다.' 라고 항상 말씀하셨기에, 물론 시험공부 하겠다고 독서실 갔다가 하루종일 농구만 하고 밤늦게 들어와서는 '집까지 뛰어오느라 땀이 많이 났어요'라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곤 했지만 그래도 시험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잘치든 못치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시험 공부도 열심히 안하고, 역시나 시험도 못쳤을 때는? 와우, 판타스틱.

'열심히 하는게 중요하다.'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열심히 하는 과정보다는 엄마한테 안혼나는게 더 중요했던 어릴 적 나에게 일종의 변명같은 것이었다. 내가 열심히만 하면, 난 시험을 좀 못보더라도 이렇게 변명할 수가 있었으니까. '열심히는 했는데 결과가 나쁘게 나왔다.' 몇 살 더 나이를 먹어서 단순히 혼나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수능을 잘 치고 싶었던 고등학교 때도 비슷하게, 모의고사를 망치고 들어온 날에도 혼나는 시간보다 왜 시험을 못친 것 같은지,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시간이 오히려 더 많았다. 특히 부모님은 항상 '얘가 학원을 안다녀서 더 잘할 수 있는데 수능공부 따라가는걸 힘들어하는게 아닐까'란 걱정을 많이 하셨고, 그럼에도 나는 죽어도 학원을 안가려고 했기에 항상 '학원에 안가도 정말 학원 다니는 애들보다 잘할 수 있겠느냐'는 류의 대화 때로는 싸움(!)가 주가 되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되면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열심히 해보지도 않고 못하겠다고 하는건 잘못된거다.' 이 문장을, 그래서 나는 좋아했다.



그런데 말이다. 요즘에는 저 말이 두렵다. 지금의 나에게 저 말은 이렇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되면, 그건 내 능력이 거기까지 인거니 그건 어쩔 수 없다.'
결국, '죽어라 열심히 했지만, 넌 못했다. 너의 능력은 딱 그만큼이다.' 라고 들리는 것이다. 어릴 때는 열심히 안했어도 안혼나려고 열심히 했다고 그랬는데, 이제는 내가 죽어라 열심히 한 것도 열심히 안했다고 변명(?)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자체도 능력이란 걸 알면서도, 차라리 내가 그런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이 내 한계가 거기까지임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런건 인정하기 싫으니까. 인정 할 수 없으니까. 아직은 정말 내 모든 걸 다 바쳤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이것 역시 참 반성할 일이긴 하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원하는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아, 난 그런 일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기 싫다.

하긴, 그런 일은 없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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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3 05:49 2009/12/03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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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프의 생각 Tracked from pope's me2DAY 2009/12/03 11:40 Delete

    초등학생 때였나 중학생 때였나,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게 중요해.' 라는 말을 듣고 어린 마음에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블로그를 없앨까.. 하는 고민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쓰는 이 블로그를 이제 그만 닫을까, 라는 고민이다.
아는 사람은 알 수도, 모르는 사람은 모를 수도 있지만, 난 블로그가 하나 더 있다. 그건 계속 유지할거니까-
그리고 아마도, 새로운 걸 하나 더 만들 생각이다.
결국 아까 했던 말처럼, 블로그를 안한다기보단 이 블로그를 닫을까 하는 고민이다.



블로그란걸 처음 시작한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첫 글이 무엇인지는 선명치 않지만 기숙사에 들어와서 내 방을 디카로 찍어서는 올렸던 게 아직 선명히 기억나고, ipuris.net 이란 도메인을 산게.. 지금 찾아보니 2005년 3월의 일이이니까, 대충 그 즈음일거다.

2006년에 블로그를 한번 날려먹었다. 혼자서 데이터베이스를 만지작 해보겠다고 하다가 날려 먹었는데, 호스팅 업체에 바로 연락을 했다면 복구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을 아이고 날려먹었네 라며 기왕 이렇게 된거 다시 하자 이러면서 그나마 성하던 자료들까지 다 날려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게 이 곳이다.



그런데 그랬던 블로그를 왜 닫으려고 하느냐,
글쎄...



역시 알 사람들은 알지도 모르겠지만, 난 개인적으로 블로그에, 좀 더 넓게는 이 사이버 공간에 엄청 관심이 많다. 나의 1학년 글쓰기 수업의 마지막 기말 소논문에도 거창하게 나와있지만, 나에게 있어 블로그는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무언가, 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무렵의 내 블로그에는 한참이나 사회 이슈에 관한 글이 많았다. 웹2.0에 관한 글은 말할 것도 없고, 평택 미군기지 관련된 글, 노무현에 관련된 글, 민주주의가 어쩌니, 이런 글이 한가득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에 지금처럼 좀 조용조용한 글들도 섞여 있었지만 말이다.

그게 위에서 언급했던 그 때, 블로그를 한번 날려먹고 나서는 마음이 변했다.
'두 번 다시 내 블로그에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글은 적지 않겠다.'
라고 다짐을 한 것이다.
내가 하는 정도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블로고스피어 어디에도 있었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사람은 더욱 많았다. 수준있는 토론보다는 말꼬투리나 잡기 일수였고, 서로가 서로를 비방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토론이 이루어졌던, 세상이라 믿었던 공간은 그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들만의 작은 우물이었을 뿐이었다.

조회수 올리려고 다른 사람의 블로그에서 펌질이나 하고, 얼짱각도 사진이나 찍어서 올리고, 다섯 줄 열 줄도 안되는 글, 그조차 발로 쓴 듯이 엉망이고, 자기 일기나 적으려면 싸이월드나 하지 왜 블로그를 해- 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아니, 애시당초 내가 믿는, 혹은 원하는 블로그의 모습에 이 세상을 끼워맞추려고 했던 내 잘못이라고 보는게 옳은 거겠지.

어찌되었든 내 블로그는 그 이후로 성격이 변했다. 나는 그저 글을 적는게 좋았다.
글을 적고 싶었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글을 다 읽고는 미소지을 수 있는 그런 글을 적고 싶었다.
그리고 내 맘에 드는 글이라는게 하루에 한개 씩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그리고 추억이란 것은 참 중요하기에, 중간중간에 내가 봤던 영화, 찾았던 전시회, 읽은 책에 대한 감상도 남겨 놓았다.



그렇게 지금이 되었다.
마음에 드는 글도 많고, 부끄러운 글도 많고, 어느덧 내 블로그에는 이십대 초반의 내가 가득 담겨 있다.
그런데,



난 더이상 내 블로그에 솔직해 질 수가 없다.
난 더이상 내 블로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편할 수가 없다.



내 블로그가 소중한 이유는, 바로 위에도 말했듯이, 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 웃음이, 내 눈물이, 내 고민이, 내 친구가, 내 가족이, 내 사랑이, 내 꿈이, 내 모든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블로그에 적는 글 만큼은 난 나에게 솔직하려 노력했기 때문일거다.

그런데 지금의 난 그럴 수가 없다.
지금의 내 블로그에는 고민이 있어도 적을 수 없고, 기뻐도 기쁘다고 못하겠고, 슬퍼도 슬프다고 못하겠다.
내가 내 블로그에 솔직할 수 없다면, 그럼 내 블로그는 생명을 잃은게 아닐까 -






자기부정일까,
이렇게 닫아버리는게 그나마,
더이상 솔직하지 못할 내 블로그에게 내 추억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거란 생각이다.


2009/07/21 08:49 2009/07/2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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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에 갔었어. 이제 대학원 신입생이 되서 다시 기숙사 입사 신청 자격이 생겼거든. 그래서 관련 서류 제출하러 참 오랜만에 간거야.

"어? 박한씨? 이제 복학하는거에요?"
기숙사 사무실 가서 서류를 제출하려고 하니까 거기 직원분이 날 알아보고는 인사를 하셨어.
2년 동안 기숙사에 살았었거든. 2학년 때는 기숙사 자치회까지 했었단마랴. 그래서 그 쪽 직원 분들이랑도 제법 안면도 있고. 그런데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계실줄은 몰랐어. 이름까지 기억하시고, 참 고맙더라구.

로비에는 아직 자치회 할 때 우리가 만들었던 화이트보드 건의함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더라. 여전히 스쿠터를 판다느니 하는 글도 적혀있고. 자치회 할 때 그 화이트보드에 사생들이 뭐라도 적어놓고 하면 잘만들었다 싶어서 괜히 기분좋아지곤 했었는데..

옆에는 작게 지금의 기숙사 자치회 홈페이지 주소도 적혀있어. 아, 자치회 홈페이지 만들고는 접속자 늘어나는거 보면서 참 뿌듯했었는데.. 이제 그 사이트는 없어졌지만 말야. 싸이월드 클럽으로 바꿨더라구. 하긴, 홈페이지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없으면 관리하기 힘들겠지.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랜선 판매, 프로그램 대여도 아직 그대로 하더라구. 과일판매도 아직 하고있데. 인기가 많다던데, 그것도 우리가 시작했던거야. 컴퓨터A/S는 없어진거같더라. 저거 한다고 참 죽을 뻔 했는데. 그래도 대신 컴퓨터 고쳐주느라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사람 대하는 법도 배우고 했던거같아.

그 이전까지는 자치회가 무슨 밀실처럼 운영됐거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선거도 항상 한 팀만 나와서 찬반 투표 형식이었어. 투표는 제대로 했나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 때 바뀐거야. 이대로 안되겠다 해서 태영이형이랑 세훈이형이 '거북선'이란 이름으로 출마를 했고, 그렇게 경선에서 이긴거지. 난 정보화사업부로 뽑혔고.

자치회 멤버들 전부 의욕도 넘쳤고, 사람들도 좋아서 일은 힘들었지만 참 즐거웠어. 그 때 이것저것 막 일을 벌인게 많아. 생각해보면 별 걸 다했는데.. 위에 적은 과일 판매나 화이트보드 설치도 하고, 세탁기 옆에 빨래 둘 곳 없다고 빨래망도 설치해주고, 뭐 기숙사 입사 환영회도 하고, 테니스 레슨 이런 것도 만들어주고.. 그러고보니까 입사 환영회 할 때는 아카라카까지 불러서 응원하고 난리났었다. 하하, 맙소사, 기숙사 식당에 식탁들 다 밀어놓고 기숙사 사는 사람들끼리 사랑한다 연세 부르고 그랬는데..

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 때의 흔적들이 조금씩 남아 있더라구. 여전히 1학사 로비에 걸려있는 화이트보드, 날 알아보는 사무실 직원 누나, 자치회에서 붙여놓은 공지사항들.. 기분이 이상한거야.

어떡해! 진짜 기분이상해!
글 적고 있으니까 또 이상해졌어.

흔적이라는거, 추억이라는거..
그 때, 난 사랑에 빠졌던 것 같아. 그 시간들을 사랑했던 것 같아.

흘러간 시간 속에 담겨있는 건 아무도 바꿀 수 없기에, 이젠 아무도 그 아름다운 추억 위에 다른 색을 덧칠 할 수 없기에... 그래서 이렇게 아련해지는건가봐. 마치 사랑했던 여자와 마주친 것 처럼 아련한건가봐..


2009/01/30 17:21 2009/01/3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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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였다. 초등학교 5학년, 아니면 6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름 컴퓨터란 것에 자신이 있었던 나는, 자그마치 책을 쓰기로 결심한다. 책이 출판되는 과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원고를 열심히 써서 출판사에 보낸 후 반응이 좋으면 책을 낼 수 있을거란 제법 체계적인 생각을 했었다.

옆에 컴퓨터 책 몇 권을 쌓아놓고는, 워드 프로세서를 켜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열 세살짜리도 할 줄 아는 컴퓨터" 였던가, "열 세살짜리에게 배우는 컴퓨터" 였던가, 뭐 그런 식의 제목이었다. 그러고보니 초등학교 6학년 때였나보다. 열 세살이면 초등학교 6학년이다.

머릿말을 썼다. 일단은 컴퓨터와 친해지는게 중요하다면서, 타자연습부터 시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게임이나 채팅처럼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게 더 좋을것이라는 말을 적었던 기억도 난다. 그러면서 '저처럼 컴퓨터 시스템 자체에 관심을 가지면 더 깊게 알수 있답니다' 이런 대책없는 자신감자만심이 철철 흘러넘치는 문장을 썼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는 1장 1절부터 본격적인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Windows를 잘 알기 위해서는 DOS를 이해해야 한다면서 뭔가를 적었던 것 같기도 하고, 바로 Windows에 대해서 적기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되돌이켜보면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지만, 그 당시의 나는 나름 진지했다. A4용지 세네장을 빼곡히 채워가며 내용을 적던 기억이 난다. 학교 숙제로 독후감을 적어도 A4 한장을 겨우 채우던 때였으니, 참 대단한 일이었다.

꿈많던 꼬맹이의 작은 도전은 아쉽게도 10여 일 만에 집필(?) 흥미를 잃어버리면서 끝나게 된다. 그래도 열심히 적었던 그 파일이 우리집 컴퓨터 어딘가엔 있을텐데, 그 이후로 수도없이 컴퓨터를 망가뜨리면서 불가피하게 해야했던 포맷에 의해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 때가 아버지께서 한참 논문을 적으실 때였던 것도 같다. 아버지께서 무언가 책을 보고,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을 적고 계신 것을 보면서 나도 흉내를 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렸던 나에게 항상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려 하셨던 아버지셨다.
그런 태도나 분위기를 보고 배우라는 의미였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할 만큼은 자랐던 나였지만, 아직은 공부보다 게임이 좋고 뛰어노는 것이 더 좋았던 나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자연히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어린 나이기도 했다.



교양으로 들었던 '디지털 컨텐츠 기획론'이라는 수업의 최종 레포트를 쓰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웹 기획과 관련된 책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는 것조차 1999년, 2002년에 출판된 것들이라 하루가 멀다하고 변해가는 웹에 대한 자료로 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2003년도의 버블 붕괴조차 겪기 이전에 나온 책들이니 말이다.

원하던 책은 찾지 못했지만, 도서관에서 나오는 내 손에는 조금 다른 성격의 책이 네 권 들려있었다.
'거미줄에 걸린 웹', '성공하는 웹사이트, 실패하는 웹사이트', '인터넷은 휴머니즘이다', '인터넷 철학'.



이런 분야에 참 관심이 많다.
인터넷과 우리가 사는 세상 사이의 상호작용,
인터넷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의 발견되는 웹의 특성,
결국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과,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 그리고 인터넷이, 이 세상이 나아가야할 미래에 대한 것들.

10년 전의 나차럼 책을 쓰고 싶어졌다.
내 장난감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컴퓨터다. 하지만 책의 주제는 좀 바뀌었다. 그 때는 컴퓨터 초보를 위한 입문서였는데, 지금은 컴퓨터 자체에 대한 내용이 아닌, 사회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이다.

칼럼과 같은 형식으로 작은 글을 하나씩 모아갈 생각이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여진 글이, 언젠가는 정말 내가 책을 낼 때 한 페이지 한 페이지의 밑그림이 되어줄거란 믿음을 가지고.





2007/12/14 19:08 2007/12/14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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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책을 읽으며, 뉴요커가 된 듯한 기분에 빠져본다.

점심은 1500원짜리 라면을 사 먹었다. 배가 고플까봐 밥까지 말아먹었다.
어쩌면 여기 오려고 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 때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마치 모든게 정해져 있었던 것 처럼.
참고로 난 남자다.

그래, 바로 그거다. '된장남'
풋, 웃기다.


스타벅스

스타벅스 로고를 살짝 비춰야만 하겠지.


스타벅스 앞을 지나가면서, 차마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쓰고싶어 졌기 때문이다. 지금 빨리 스타벅스 안에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글을 쓰지 않으면 큰일날 것만 같았다.

주제도 없고 재미도 없는 글, 오늘처럼 비오는 날에는 이런 글이 은근히 매력적일지도 모른다.







유럽여행을 갔을 때 영국에서 보았던 스타벅스는 정말 '허름한 커피집'이었다.
그것도 테이크 아웃 커피를 파는 곳. 머리가 백발이 되신 할머니 두 분 서양 사람을 상상해야 한다. 스타벅스에서 커피 마시는 우리나라 할머니를 상상하기는 아마 좀 힘들겠지. 정도가 그 안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딱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우리나라처럼 스타벅스가 럭셔리한 곳도 없다지. 커피값은 그렇게 비싼데도 지금 이렇게 비오는 날의 신촌 스타벅스에는 사람이 참 많다. 밥값이 우리나라의 두배 정도는 하는 런던이지만 스타벅스 커피값은 비슷했으니 단순히 '외국과 실제로 몇 백원 밖에는 차이가 안난다.' 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는 듯 하다. 프렌차이즈 기업이라 그렇다고? 거기는 빅맥 세트도 6000원이 훨씬 넘었거든. 어디 한번 둘러보자, 남자 혼자 온 테이블은.. 오호, 나까지 셋이다. 나 혼자일 줄 알았는데 제법 많네? 셀카질까지 해야하는건가?
누군가는 된장녀를 옹호하고, 누군가는 된장녀를 비난하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스타벅스는 된장녀 논란(?)을 거치면서 '허영심' 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안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래, 씨밀레에서 내가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다원주의 사회이다. 무언가를 판단함에 있어서 그 근간이 되는 기준들은 너무 다양하다. 개개인의 생각이 다르다. 동시에, 그 하나하나의 생각이 모두 존중받아야 하는 민주주의 사회이기도 하다.'
스타벅스에 대해서, 여대생들의 뉴요커 환상에 대해서, 된장녀에 대해서, 무엇이 옳다고, 그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결론지을 수 없게 되어버린 세상이다. 
바람직한 세상일진 몰라도, 사실 그것도 모르겠지만 재미없는 세상이다.



비오는 신촌을 거니는 사람들을 한번 찍어보려 카메라를 들었더니, HOLLYS COFFEE 라는 또다른 커피 전문점이 보인다.
스타벅스에서 할리스를 찍는다니, 전혀 이상할 것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러니하다.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커피 전문점인 덕분에, 추억이 몇 가지 담겨있다.

대학을 처음 왔을 때, 입학하기 전에 Placement Test 라는 수학시험을 쳐야만 했었다.
미적분을 배우지 않고도 공대를 들어올 수 있는 7차 교육과정의 허점을 우려한 대학의 궁여지책이었지만, 사실 천명의 공대생 중 미적분 안한 사람이 10명은 되었을까? 어째든 치루어야만 하는 시험이었고, 예비대학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미리 친해졌던 수시 친구들과 함께 바로 저 곳, 할리스에서 수학의 정석을 펴놓고 공부를 했었다. '공부 하는 척을 했다' 라고 표현하는게 낫겠다.
아직 그 때 친구들을 가끔 만난다.

마지막으로 생일 파티를 해 본적이 언젠지 가물가물하다. 생일 축하야 받았지만, '파티'말이다.
방에 불을 끄고 케이크 위에 꽃핀 촛불 앞에서 만족한 듯 환하게 웃으며 찍은 어릴적 사진, 그게 아마 유치원 때 쯤일꺼다.
그런데 올해 생일에는 파티를 했었다.
한 사람이, 저기 내 눈 앞에 보이는 저 할리스에서 2층이었나 3층이었나 작은 케이크 한 조각에 예쁜 초를 꼽아놓고는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타오르던 촛불이 얼마나 따스하던지...
조금, 아프다.


할리스 커피

저기였다.





어떤 남자가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우산을 쓰고 간다.
어떤 아저씨는 우산을 빙빙 돌리면서 간다.
어릴 때 난 우산을 돌리는 걸 참 좋아했었다.
우산의 알록달록한 색깔과 무늬가 만들어내는 황홀한 화음에 취해, 걷다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우산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말하셨다. 우산을 돌리면 빗물이 다른 사람한테 튄다고.
'어떡하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나는, 결국 우산 돌리기를 꾹 참으며 걷다가 주위에 사람이 없다 싶으면 엄마에게 빗물이 닿지 않도록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우산을 빙빙 돌렸다.
비오는 하늘의 황홀한 색에 취해, 나는 환하게 웃었다.

나는 요즘 우산을 돌리지 않는다.
누가 나에게 알록달록한 예쁜 우산을 선물해줬으면 좋겠다.



오늘 오랜만에 혼자 돌아다녀 봤다.
오랜만에 '혼자' 돌아다녀 본건지, 오랜만에 혼자 '돌아다녀' 본건지... 이런건 원래 언급하지 않고 글 읽는 이에 따라 알아서 이해하도록 두는게 편하지만, 지금은 그냥 마음 가는데로 글을 쓰고싶다. 이런 것도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소리만 골라 한다.

기분이 이상하다.
하얀 도화지가 된 것 같다.
어릴적, 미술시간에 쓰려던 도화지가 비에 젖어버려서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그 도화지가 된 것 같다.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색 도화지.
그 위로 비가 내린다.
난 축축히 젖는다.



그리 길지 않았던 여유.
이제 하나씩 결정해야할 때다.



장마가 시작된단다.
비가 계속 내린다.
비가 아직도 계속 내린다.




end.

end.





2007/06/22 18:07 2007/06/2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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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때로 기억한다. 인터넷과 관련된 작은 경시대회였다.

기껏해야 작은 교내 백일장이나 나가봤던 어린 나에게, 시험을 보기 위해 따로 준비된 시험장으로 이동해야 하는, 그런 큰(?) 규모의 시험은 나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OMR답안지라는 것도 그 때 처음 알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 밖에 계셨고, 내가 시험을 치르고 나오자 환한 표정을 날 맞아 주셨다.
"시험은 잘 쳤나? 어떻드노?"
"잠시만요..."
나는 공부할 때 썼던 책을 뒤적뒤적 찾아보았다.
아버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계셨지만, 궁금하셨는지,
"왜, 뭐 모르겠드나?"
라고 물으셨다.
"잠시만요... 전부 다 풀긴 풀었는데... 한 문제를 잘 모르겠던데... 대학교를 나타내는 인터넷 주소가 ac.kr 이 맞는지 잘 모르겠는거에요~ 그래서 막 생각하다가 하나 골랐는데... 아 그게 어디있더라..."

"와! 맞았다!"
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아빠! 제가요~ 한 문제를 잘 모르겠어서요~ 막 생각하다가요~ 아 그러니까 그 문제가요~ 대학교 인터넷 주소는 뭘로 끝나는거냐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막 생각하다가요~ ac.kr 에서 ac가 아카데미 같은거에요~ 그래서 그걸로 찍었는데 맞았어요!"
아버지께서는 내 말을 들으시면서 얼굴에 화색이 도셨다. 감정 표현도 잘 안하시던 분이셨는데, 내가 신나서 말을 하면 마치 자신의 일인듯이 신나게
"그렇지, 그렇지!"
라며 좋아하셨다.



며칠 전, 정보처리 산업기사 실기 시험을 치르고 왔다. 실기라지만, 필답형으로 바뀌었기에 필기고사나 다름 없었다.
전공과 관련된 자격증 시험이라, 일찌감치 문제를 다 풀고는 퇴실 가능한 시간을 기다리다가, 갑자기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날씨가 참 좋은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기분도 너무 좋은 날이었다.


2007/05/02 14:30 2007/05/0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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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그러니까 아파트로 이사오기 전, 우리 가족은 작은 주택에 살았다. 어렸던 내게는 너무 높아보이던 주황색 2층 벽돌집이었고, 앞으로는 작은 마당이 있었다. 그 마당에는 내 키만했던 작은 꽃나무들이나 화분들이 놓여있는 정원도 있었다. 그 정원에서 개미들이 줄지어 지나가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 마당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오면 부엌이 나왔다. 작은 부엌, 은색 린나이 가스레인지가 있었다. 아직도 우리 가족은 그 가스레인지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방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방은 단칸방이었다. 방 문에서 마주보이는 쪽으로 장농이 있었다. 왼쪽으로는 작은 창문이 나 있었고, 창문 밑으로 내 키를 표시해놓은 작은 눈금들이 그어져 있었다. 창문 바깥으로는 전깃줄 위에 앉은 참새가 보였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돌아보면 작은 다락방이 있었다. 어린 나는 허리를 펼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허리를 많이 숙여야만 들어올 수가 있었다. 그 곳이 바로 처음으로 가진 내 방이었다.



내 다락방에는 침대가 있었다. 각목을 깎고 나무를 조립해서, 아빠가 직접 만들어주신 침대였던 것같다. 그래, 푹신푹신 하라고 침대의 스프링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검은색 고무줄을 그물처럼 연결했다. 기억난다. 항상 왼쪽에는 아빠, 오른쪽에는 엄마를 두고 단칸방 한가운데서 잤던 나는 내 방이 생기고부터 그 침대에서 혼자 잠을 자게 되었다. 9시가 넘으면, 10시가 넘으면, 나는 "엄마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굿나잇~" 이라 외치며 단칸방으로 쪼르르 달려 올라갔다.

창문도 없는 다락방이었기 때문에, 계단 반대쪽으로 통풍을 위해서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밤에 잠들기 위해 누우면 그 구멍이 보였고, 새까만 구멍이 나는 참 무서웠다. 언젠가부터 그 구멍에서 찬 공기가 들어온다며 아버지가 구멍을 신문지로 막아버렸지만, 나는 그 신문지 뒤로 여전히 존재하는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직 이불에 지도를 그릴 때였다. 나는 그 사실이 창피했고, 침대에 누워 왼손은 '오줌을 누게 만드는 나쁜 악마', 오른쪽은 '오줌을 안누게 하는 착한 천사'라고 상상하며 매일 밤 칼싸움을 했다. 아슬아슬하고 숨막히는 대결이었지만, 항상 최후의 승리는 천사의 몫이었고, 신기하게도 나는 그 이후로 밤에 지도를 그리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가끔 엄마가 침대 옆에 오셔서 동화책을 읽어주셨던 것 같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책은 '아기돼지 삼형제'였다. 첫째 돼지의 집이 날아가고 둘째 돼지의 집이 부숴질 때 걱정되고 불안해하다가, 셋째의 튼튼한 벽돌집을 보고는 안도하며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조금씩 자랐고, 이젠 나도 다락방에서 허리를 조금 숙여야했다. 언젠가부터 더이상 천사와 악마는 손가락에서 싸우지 않아도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가족은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드디어 '집'이 생긴 것이다. '내 집'의 꿈이 실현된 것이었다. 집들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줬다. 부모님은 행복해하셨다. 나에게도 새로운 내 방이 생겼다. 예전의 내 다락방보다 훨씬 컸다. 베란다라는 것도 있었다.

두번째 내 방에서도, 되돌이켜 보면 많은 추억들이 있다. 처음으로 예쁜 내 책상을 샀던 기억, 초등학교 때 시험을 못치고 들어와 엄마에게 혼나고 내 방 책상에서 울었던 기억, 베란다 한쪽에 철사를 둥글게 구부려 두고 고무 공으로 농구를 했던 기억, 아빠의 병원에서 침대를 가져와서 새로운 내 침대가 생겼던 기억...

하지만 나의 생애 첫번째 '내방'은 다락방이었다. 작은 다락방, 아빠가 직접 만들어준 침대가 있고, 엄마가 그 침대 곁에 앉아 동화책을 읽어주던, 바로 거기 말이다.




2007/01/14 17:20 2007/01/14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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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산 사람이다. 부산에서 태어나서 부산에서 자랐다. 그리고 난 당연히 롯데 팬이다.
'당연히'라는 위험한 단어를 쓰지만, 사실 당위는 반발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맹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부산과 롯데의 관계에서만은 그 말이 과하지 않을 듯 하다.
'부산사람이면서 롯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산 사람들은 열렬한 롯데의 팬이다. 여기서 부산 시민이라고 하지 않고 부산 사람이라고 한 것에 주목!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중요한게 아니다. 한 번이라도 사직야구장에서 롯데 경기를 관전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롯데 팬이 될 수 밖에 없으리라.


나역시 어릴 때부터 롯데의 팬이었다. 어린이 롯데 야구단 팬클럽도 하고, 유치원 다닐때였나..? 롯데 잠바(?)를 받기 위해 사직구장을 찾아서 박정태, 마해영의 싸인도 받을 뻔! 하기도 했다. 한국 시리즈에서 3루수 공필성의 다이빙캐치를 아직 기억하고(아마 해태전이었던 것 같은데.. 빙그레였나? 붉은 유니폼이었다.), 염종석이 데드볼을 던진 뒤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던 모습 역시 아직 기억한다.

오직 롯데만 좋아하는건 아니다. 신바람 야구, LG도 상당히 좋아한다. 하지만 역시 한 팀을 꼽으라면 역시 롯데다. 롯데라는 이름에서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내가 롯데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내 어릴 적 추억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공필성의 다이빙캐치를 기억하는 이유는, 온 가족과 삼촌, 다른 친척들이 모여 그 무렵 우리집에 처음 장만했던 텔레비젼으로 함께 그 경기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필성이 멋지게 몸을 날려 다이빙 캐치하는 순간, 과묵하기만 하던 어른들의 그 짧은 환호는 시간이 지나도 쉬 잊혀지지 않는다. 어린 '신인'이었던 염종석에게서 어린 '유치원생'이었던 나는 이유없는 동질감을 느꼈었고, 그래서 부상과 슬럼프로 부진할 때 안쓰러워했었다.

어릴적 아버지와 함께 가끔 찾았던 사직야구장, 그 시절 우리집은 유치원생이던 내 걸음으로도 사직야구장까지 걸어서 20분이면 충분했다. 6회였나 7회였나, 그 때 부터는 무료로 사직야구장 안에 들어가서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기에 퇴근하신 아빠를 졸라서 야구를 보러 가기도 했었다. 저녁에 집에서 놀 때도 창문 밖으로는 사직야구장의 환한 불빛이 보였고, "와~" 하는 함성이 터지면 '누군가가 홈런 쳤나보다...' 라며 환호하고 있는 롯데 선수들과 팬들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파울로 관중석으로 넘어온 공을 잡은 사람에게 주위에서 '아 주라 아 주라 (애 줘라 애 줘라)' 하는 말도 내 귀로 직접 들었다. '부산갈매기'를 배운 것도 노래방이 아닌 사직야구장에서였고, 파도타기 응원도 사직야구장에서 배웠다.

주형광의 환상적인 제구력을 기억하며, 윤학길 김응국 김민호를 기억한다. 마해영이 트레이드 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왠지 모를 공허함을 느꼈다. 나는 아직도 박정태의 타격폼을 흉내낼 수 있다.



롯데는 한동안 부진했다. 저번에는 '너희가 응원해라 우리가 야구할께' 라는 롯데팬의 외침이 인터넷에 떠돌기도 했다.
우리집은 이사를 했고, 나의 야구에 대한 관심 역시 줄어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터 농구를 했고, 내 관심은 농구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롯데는 영원히 나의 팀이었다. 아마 모든 롯데 팬들이 그럴 것이다. '너희가 응원해라 우리가 야구할께'라는 문구에서조차, 나는 롯데팬들의 믿음과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팀이 하위권을 맴돌아도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서 롯데를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나는 롯데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롯데 팬이 우리나라 최고라고 생각한다.



어제7월 16일, 전체 8개 구단 중 리그 7위 롯데가 1위 삼성에게 14:0 으로 이겼다.
그리고 네이버에는 이런 기사가 떴다. 그냥 한번 눌러본 동영상, 그 안에는 롯데가 있었다. 롯데 팬이 있었다. 내가, 내 추억이 그 곳에 있었다.

기사 보기

이런 팬이 있어서 롯데 선수들은 야구할 맛이 나는 것 같다. 역시 리그 7위 임에도 불구하고 전 구단 통틀어 홈 승률이 가장 높다.



지금은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어서 사직야구장을 찾기는 힘들다. 바쁘다는 핑계로 야구장을 찾은지도 오래되었다.
하지만 잠실 야구장에서 롯데의 경기가 있다면, 꼭 한번 찾아봐야지, 하는 다짐을 해본다. 잠실에서 울려퍼지는 부산 갈매기를 상상하면 가슴이 벅차다.




2006/07/17 17:01 2006/07/17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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